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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의 의절, 아디다스와 푸마

□■◆◇ 2021. 3. 3. 15:32

아디다스의 아돌프 (좌) vs 푸마의 루돌프 (우)

 

신발공장에서 일하던 크리스토프 다슬러에게는 아돌프와 루돌프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두 아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갔다. 주위에서 '아디’라고 불리던 동생 아돌프는 아버지가 하던 일을 이어받아 부엌에서 직접 운동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반면에 ‘루디'라고 불리던 형 루돌프는 도자기 공장에서 관리직으로 잠깐 일하다 가죽 도매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다가 루디는 1924년 7월 고향 마을로 돌아와 동생이 하던 사업에 동참했다. 상호를 다슬러 형제 신발공장으로 바꾸고 두 형제가 함께하자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될 예정인 1936년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있을 때, 아디는 이것이 하늘이 내려준 좋은 기회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형과 함께 만든 스파이크가 달린 운동화를 가방에 가득 담아 올림픽 선수촌으로 향했다.

 

선수촌에서 아디는 미국 단거리 육상선수인 제시 오언스를 설득해 자신이 제작한 신발을 신고 올림픽에 출전하도록 했다. 이는 흑인에 대한 최초의 상업적 후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언스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네 개나 따내는 기적을 이루었다. 육상 최초의 올림픽 4관왕이 탄생하자 다슬러 운동화까지 덩달아 유명해졌다. 두 형제의 책상에는 전 세계에서 날아든 주문서와 응원의 편지가 가득 쌓였고, 다른 국가대표팀 선수나 감독도 다슬러 운동화에 관심을 보였다. 사업은 엄청난 호황을 누렸고, 1930년대 후 반에는 한 해 평균 20만 켤레가 넘는 운동화가 팔렸다.

 

제시 오언스

 

하지만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아디와 루디도 사업을 함께 하면서 수차례 언쟁을 벌이고 갈등을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간신히 둘 사이를 이어주던 갈등관계마저 종지부를 찍고 형제는 서로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다.


1943년 연합군이 독일을 폭격할 당시 루디와 그의 가족들이 방공호에 대피해 있었는데, 얼마 후 아디 부부도 그곳으로 피신해왔다. 루디는 동생이 들어오면서 이렇게 얘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비열한 자식도 곧 이쪽으로 올 거야.”


루디는 동생이 말하는 사람이 연합군이 아니라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분노했다. 얼마 뒤에는 루디가 나치 친위대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아디가 밀고해 형이 미군에 붙잡힌 후 둘 사이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형제는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1947년에 완전히 갈라섰다.

 


그 후 루디는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고 처음에는 이름을 루돌프와 다슬러를 조합한 루다로 지었다가 1948년 '푸마' 로 이름을 바꿨다. 한편 아디도 1949년 아디다스'라는 회사를 차렸는데, 그 이름은 '온 종일 나는 스포츠를 꿈꾼다 All Day I Dream About Sport' 의 머리글자라는 말도 있고 아디와 다슬러를 조합한 말이라는 얘기도 있다.


두 회사의 경쟁은 치열하고 냉혹했다. 고향 마을 역시 두 파로 갈렸는데, 그 덕분에 목이 구부러진 사람들이 사는 마을' 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누군가가 마을을 방문하기라도 하면 어떤 브랜드 신발을 신었는지 확인하느라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디다스는 승승장구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 2:0으로 서독을 이기고 있던 헝가리 선수들이 갑자기 내린 비에 미끄러지며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반면, 서독 선수들은 우천을 대비해 미끄러짐을 막을 수 있는 아디다스의 축구화를 신고 있어서 기적 같은 3:2 역전극을 연출한 것이다.


아디다스에 늘 선두를 내주던 푸마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강력한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월드컵 결승전, 경기 전 펠레는 주심에게 양해를 구하고 축구화 끈을 다시 묶었다. 축구 황제 펠레의 축구화에 새겨진 푸마의 로고가 전 세계에 방영되었다. 브라질의 우승으로 월 드컵의 막이 내리고 푸마의 매출은 수직 상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