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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자를 살린 럼주

□■◆◇ 2021. 3. 6. 22:31

 

바카디는 세계 최대의 출하량을 자랑하는 영국의 프리미엄 럼주 브랜드다. 1814년 10월 스페인에서 태어난 돈 파쿤도 바카디 마소는 열다섯 살 무렵 쿠바 산티아고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와인 상인으로 일하며 살던 돈 파쿤도는 어느 날 문득 럼주를 잘 만들면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누가 들어도 납득이 안 가는 얘기였는데, 당시 럼은 거칠고 맛없는 싸구려 술로 인식되어 상류층에서 외면당했기 때문이다. 동료들도 대부분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고 항구로 들어오는 해적들이나 사마실 거라고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돈 파쿤도는 새로운 럼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거듭했고 마침내 자신이 찾던 새로운 제조 과정을 발견했다. 깨끗한 숯에 여과하고 난 다음 떡갈나무 통에 저장하여 증류시키는 방법이었는데, 그렇게 하면 불순물을 제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부드럽고 향이 좋은 럼을 얻을 수 있었다. 화이트 럼과 세계적인 주류 브랜드 바카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제조법을 터득한 돈 파쿤도는 인근의 작은 폐양조장을 매입해서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그런데 양조장을 사들이고 보니 건물 서까래에 엄청나게 많은 박쥐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돈 파쿤도는 박쥐를 없애는 일도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그대로 놔두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나중에는 브랜드 상징으로 박쥐를 이용하게 된다.

 

쿠바 사람들에게 박쥐는 건강과 행운, 가족의 화합을 상징한다. 19세기경 쿠바는 문맹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새로운 상품을 잘 알리려면 사람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시각적인 상표가 필요했다. 기억하기에 좋은 로고로 박쥐만큼 적당한것은 없을 것 같았다.

 

박쥐 외에도 바카디 병에는 또 한 가지 상징이 보이는데, 바로 스페인 왕실의 문장이다. 이 문장은 바카디 럼이 스페인 여왕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아니 정확하게는 여왕의 아들인 알폰소 13세 왕자의 병을 낫게 해준 뒤 로고에 새로 추가된 것이었다.

 

 

1892년 알폰소 왕자는 심한 유행성 감기에 걸려 몸져눕게 되었다.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아도 병이 나아질 기미가 안보이자 최근에 쿠바를 다녀온 왕실 주치의가 돈 파쿤도의 럼주를 마셔볼 것을 제안했다. 그날 밤 럼주를 한 잔 마신 왕자는 며칠 만에 처음으로 깊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고 다음날 아침에는 열도 다 내리면서 병이 호전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후 스페인 왕실은 훌륭한 럼주를 만들어 왕자의 목숨을 구해 준 데 대한 보답으로 바카디 럼의 상표에 스페인 왕실의 문장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렸다. 그날 이후 바카디 럼은 스페인 왕가에 꾸준히 공급되었으며, '럼주의 왕, 왕실의 럼'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하기도 했다.